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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이는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
두툼한 안경을 썼지만 없어보이지는 않았다.
넌지시 물어봤다.
“너, 어디사냐?”
“시범아파트”
시범아파트라면 못사는 놈은 아닐텐데 이새끼는 밥을 싸오지 않는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밥하나만 더 싸줘”
“왜”
“결식아동이 하나 있어”
“여의도 중학교에 결식아동이 어딨냐?”
“몰라, 하나 싸줘.”
점심시간에 말했다.
“야, 라면 내꺼까지 사와라. 내가 밥줄게”
“왜?”
“라면 먹고 싶어서 그래, 이새끼야.”
어느 토요일, 성헌이가 말한다.
“엄마가 너 오란다.”
“응?”
“우리집에서 밥먹자”
‘아, 이새끼. 계모인가보다.’
의외로 어머니의 모습은 인자했다.
성헌이 방에는 각종 OST LP가 벽에 걸려 있었다. 근사한 토요일 점심과 저녁을 얻어먹었다. 왜 이새끼가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지 이해가 된 건 그날 밤이었다.
“이 기타 받침이 200만원짜리야” 성헌이가 말했다.
등나무를 철사로 길을 내어 받침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위의 클래식 기타에서는 황홀한 소리가 났다. 트로트가 감미로웠다.
새벽 3시가 되자 조** 아저씨가 반짝이 옷을 입고 양주 한병을 들고 찾아왔다. 한시간 뒤에는 최** 아줌마가 찾아왔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다가 아저씨의 반주에 맞춰 킬****의 **을 불렀다. 최** 아줌마는 신곡 같은걸 불렀는데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노래는 사** **였다.
6시쯤되자 초인종이 울렸다. 옆집에서 과일을 깍아왔다.
“덕분에 새벽의 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방해가 된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돈주고도 못듣는걸...”
눈이 감겼다. 16살에게 양주 두잔은 버거운 주량이었다.
오후 2시가 되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어나셨다. 밥을 못싸오는 건 이유가 있었다. 내가 볼 때는 챙겨주시지 않았던게 아니라 이새끼 천성이 뭘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 거였다. 점심을 싸놓고 주무셔도 잘 들고다니지를 않는다고 하셨다.
그해, 올림픽 개막식이 있었다. 전야제 음악을 맡으셨다고 했다. 여의도 고수부지. 사람이 너무 많았다. 표가 있었지만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 뒤에는 63빌딩이 있었다.
“시발, 저기 올라가서라도 보자.”
“굿! 아이디어.”
60층 전망대 엘리베이터 가격은 2천원이었다.
“시발, 뛰어가자.”
15층까지는 견딜만 했다.
30층까지 올라가자 나의 판단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40층에서는 63빌딩 설계자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이런 고층빌딩 만드는 새끼들은 다 죽여버려야 돼. 타워링 봐. 다 타죽잖아.”
62층에 올라왔다.
“전망대는 엘리베이터 이용 승객만 입장 가능합니다.”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박종팔이랑 붙어도 이길 것 같은 전투력이 치솟았다. 시발, 신님!
울면서 내려왔다. 데스크를 찾아가 따졌다.
“누나, 이건 너무한거 아니에요? 전망대는 올라갈 수 있게 해줘야 하는거 아니에요?”
“안됩니다. 손님, 그러면 아무도 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지 않을거에요.”
“아니, 어느 미친놈이 우리말고 또 거길 걸어 올라가요.”
“업무용 엘리베이터는 60층까지 운행합니다.”
창피하게도 성헌이와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불현 듯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병신도 갑을병이 있다.”
성헌이 어머니는 우리에게 한뭉치의 경기장 티켓을 주셨다.
이경근의 유도 결승전, 유남규의 탁구 개인전, 여자핸드볼 결승, 어느하나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그래도 가장 흥분이 되었던 것은 잠실 메인스타디움이었다.
봅슬레이 부부카의 장대높이뛰기 결승, 칼루이스의 멀리뛰기 예선, 남자 200미터 예선, 여자 1500미터 예선이 있던 날.
성헌이와 성욱이, 이석이와 난 메인스타디움의 A석에서 마침 벌어지고 있던 부부카의 금메달 따는 장면과 이윽고 선언한 세계기록 경신 포기에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싸온 김밥을 입에 우겨넣었다.
뒤에서 아이가 칭얼거렸다. 은빛같은 금발, 파란 눈을 한 남자아이였다. 우리가 먹는걸 먹고 싶었던게다.
“자, 김밥”
나는 아이에게 김밥을 쥐어주며 170쯤 되는 키에 파란 눈, 그리고 눈부신 금발의 엄마에게 웃어보였다.
아이가 미친 듯이 김밥을 먹자, 우리들은 너나 할것없이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을 한 듯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애 때문이 아니라 금발의 그녀가 환하게 웃어줬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매점으로 달려가 각종 과자며 3분라면을 들고 다시 자리로 왔다. 그녀는 아줌마로 보이지 않았다. 16살 욕망의 눈에는 한갓 욕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되지는 않는 영어가 술술 나왔다. 같이 경기를 즐기며 몸짓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네덜란드에 사는 그녀도 영어가 썩 유창한 편은 아니었다. 신기하게 말은 정말 잘 통했다.
86아시안게임 히어로 임춘애가 1500미터 예선을 준비했다.
“아시안 탑스프린터 임춘애, 쓰리 골드메달리스트!”
그녀는 처음본다고 했다.
“아, 오프닝 세레머니 토치걸!”
기대한다고 했다.
경쾌한 총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꼴등.
“샹년, 배가 불른거야.”
“라면을 먹였어야 해.”
우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남은 희망은 장재근이었다.
“두유노우 장재근?”
역시 몰랐다.
아니, 아시안게임 2관왕이자 아시안게임 200미터 기록보유자 장재근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이여자 집에 TV는 있는건가?
“히 이즈 아시안 탑 레코더 투 헌드레드 미터 골드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영어 공교육의 문제점이 여실히 들어나는 순간이었다.
땅, 꼴등.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하늘의 ,비둘기도 자지러지게 난다. 16살의 어린 욕망들은 자신들의 영혼만큼이나 벌겋게 얼굴이 상기되었다.
“시발, 조국이 우리를 위해 해주는 게 없구나.”
그녀는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다. 잠실운동장 루프 끝으로 태양이 걸릴즈음이었다.
워커힐호텔.
나이프 네 개, 포크 네 개, 숟가락 존나많이...
처음보는 식탁이었다. 민병철생활영어에서 본대로 바깥쪽부터 집었다.
“병시나 네프킨”
“응...”
댄디한 서울의 도시어린이는 목에 네프킨을 건다. 우리 넷은 어느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격식있는 태도로 고기를 썰었다. 아마 콧구멍으로 먹었던 것 같다. 우리는 아마 똑같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아이를 재우고 저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와 침대로 갈 것을...
집에오는 버스 안에서 덜떨어진 어린 욕망덩어리 넷은 저 붉은 노을처럼 하염없이 추락하기만 했다.
나는 용케 주소를 받아냈다. 결국 다들 알려주긴 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펜팔을 한건 나였다. 물론 그 어떤 책에도 어린 욕정을 담아주는 예제가 있는 책은 없었다. 포르노에 캡션이 없다는 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그리고는 잊혀지는 듯 했다.
1994년 뜬금없는 해외전화가 왔다.
네덜란드의 그녀. 페이스투페이스도 안되는 내가 그녀의 말을 알아먹을 수는 없었다.
마침 미쿡 이민간지 4년만에 혀가 꼬부라져서 돌아온 외사촌형이 우리집에 있었다.
내용인즉, 그녀에게 나이어린 동생이 있다. 동생은 아시아 정치 전공을 해서 일본을 가려고 했다. 그러나 TO가 1년이 넘어야 나고 그럴거면 6개월은 한국의 연세어학당이나 서울대의 한국어 과정에 다니려고 한다. 기거할 곳을 좀 알아봐줄 수 없느냐가 요지였다. 영어 방언이 터졌다. 우리집에 방이 두 개 남는다. 짧게 있을건데 뭐하러 그러느냐, 우리집은 홈스테이 전문이다. 우리집으로 와라.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점술가가 말했다.
“당신은, 전생에 지구를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10년을 기다려 온 욕망의 불꽃이 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스물세 살, 언니의 폼새로 보아하건데 금발의 블론디 아이즈, 하앍하앍. 두근두근, 팔랑팔랑.
김포공항을 180km로 달리는 에스페로 자주색을 봤다면 그건 나였다. 나리타에서 잘을 타고 온다고 한 금발의 그녀를 기다리는 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일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사랑해요.”
“우윳빛깔 알라~”
정작 게이트에서 나에게 말을 건 건 163cm쯤 되는 키에 완벽한 몸매를 가졌지만 완벽한 케냐혈통의 여자였다. 코가 좌우로 5cm은 넘어보였다.
입양된 여동생.
신을 믿은 내가 미워졌다. 니체가 왜 신이 없다고 외쳤는지 알 것 같았다. 걔도 분명히 금발녀 소개팅에 흑인 여자가 나왔으리라...
엄마는 말없이 문닫고 안방으로 들어가셨지만 그녀의 밝은 성격과 활달한 부침성은 지구인 이상이었다. 엄마는 딸 삼겠다고 했다.
3일뒤, 샤워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건 하나만 달랑 들고 나오는 그녀를 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육체는 케냐인의 몫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인종을 뛰어넘는 인류애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온지 일주일이 지났다.
5월 26일.
난 306 보충대로 입대를 했다.
부대는 삼송리에 있었다.
누구는 306보충대에서 배정받을 수 있는 최남단이라고 했다. 1공병여단 113대대 2중대. 우리는 통일로 선상의 방벽에 근무를 섰다. 문밖 1m 앞에는 나들이객의 차량이 끊이지 않았으나 안은 추웠다. 군대는 여름 뒤 겨울이었고 겨울 뒤 여름이었다.
김대중의 자택은 우리보다 전방이었다.
여름에 자대배치를 받은 나는 다음날부터 군단 본청 페인트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발소에서 신나를 먹고 취해 히죽거렸다. 고참들은 이해했다. 그렇다고 곡갱이 자루를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상열 상병과 1시간 반짜리 보초를 서던 새벽, 상병이 입을 열었다.
“뭐하다 왔냐?”
“학교 다니다 연극했었습니다.”
“뭐”
“바쁘다 바뻐요.”
“어, 이새끼, 어어...”
“이병, 차양현.”
“너 거기서 뭐였어?”
“외팔이 동칠이였습니다.”
“어어, 이새끼... 나 그거 봤는데...”
그가 툭 쳤다.
“이병 차양현”
“연극 이런거 하면 여자 존나 따먹는다는데 너도 그랬냐?”
“아닙니다.”
“개새끼, 솔직히 말해.”
이상열은 집요했다.
할 수 없이 난 92년 집에서 쫒겨나 극단에 들어오게 된 이야기, 나라시 밤마다 3만엔씩 벌었던 이야기. 그 돈으로 이태원의 별이 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시간은 짧았다. 다음날 공사계였던 이상열은 이사종계 창고 정리로 날 빼놨다.
“어제 못들었던 거 들어보자.”
“네...”
다른 이야기는 술술 풀어냈지만 내 여자, 혹은 나와 관계된 여자를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극단 식구에 대한 질문은 아주 집요했다. 지금은 계동춘으로 더 잘 알려진 원영이는 내 혀끝에서 천하의 난봉꾼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열이 좋아하는 여자단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원영이가 대머리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8시간을 지어낸 이야기로 풀어낼 수는 없었다.
만만한건 케냐의 그녀였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 네덜란드의 금발 그녀가 저한테 전화를 한겁니다.“
이상열은 침을 꼴닥 삼켰다.
“동생이 있다, 23살이다, 한국에 와야 되는데 집을 알아봐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구요. 그래서 얼마든지 와라. 한국에서는 우리집에서 잘 수 있다고 말했죠.”
말은 술술 풀렸다. 그녀를 마중하러 간 차가 1500cc 에스페로에서 그랜저 3.0으로 바뀐 것 빼고는 구라 한 점 없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년이랑 잔거야?”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게 말입니다. 근육이 예술이더란 말입니다. 왜, 말근육 있잖습니까, 가슴이 말입니다. 완전히 탱탱한 게...”
“그러니까 이새끼야, 떡을 친걸 말하라고!”
“군대 왔지 말입니다.”
깨어나보니 보훈병원 응급실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동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상열이 야삽으로 내 머리를 쳤고 6바늘을 꼬맸다고 한다. 이상열은 이빨 4개가 나갔다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갔을 것이다.
3일간의 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보름간의 로맨스를 지킨 댓가 치고는 좀 컸다.
난 관심사병으로 찍혔고 덕분에 영선반으로 차출될 수 있었다. 군단장, 사단장, 사령관의 책장, 화장실 깔판, 신발장을 만드는 보직 덕분에 군생활 동안 외박을 제외한 휴가일수는 150일을 넘겼다.
아파트 동네 아주머니들은 “방위도 힘들지?”했고
엄마는 “나도 너랑 똑같은 밥 먹는다, 궁금하냐?”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 공백은 그리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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