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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3년
한때 난 끝없이 빈둥거리고 싶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텅빈 방에서 뒤척이기 시작해 빨대로 빨아먹는 소주 몇병, 차갑게 식은 피자 몇조각으로 플스2의 "데빌 메이 크라이"의 세계에서 잠시 허우적 대다가 빈둥빈둥 굴러서 옆방으로 도망친 후 한게임 맞고(SK 캐쉬백으로 600원 과감히 지출) 한판 땡겨 주다가 1939년의 됭케르크로 가서 지크프리드 장벽을 마주한채 ":메달 오브 아너"속 일병이 되거나 다시 빈둥빈둥 굴러와서 얄팍한 리뷰 한편에 빼앗다 시피한 "애뉘 기븐 쏜데이"의 기 핏발 터지는 파치노 형님의 목덜미 동맥이나 감상하다가 하고 싶었다.
요컨대 나는 나대로 온전하게 일요일을 쪼개고 싶었던 것이다.
근데, 그러지 못했다.
뭐에 끌려가듯이 난 영화관 앞에 있었다.
500만이 검증뭐시기 했다는 봉준호의 빈정거림 앞에 나도 모르게 온 것이다.
물론 졸라 거지꼴로.....
80년대, 내 무력함의 기저는 저 5월의 광주부터는 아니다. 꾸준히 나라를 말아먹어준 군부독재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얄팍한 논리로 자신을 감싼 감상이 있었고 나 역시 이따위로 공부해서는 프레스에 잘린 손을 부여잡으며 택시를 잡는 노동자와 다를바 없을 것이라는 자괴감 비슷한 것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라나다를 타고 싶었지 달구지를 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사회에 저항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 였다. 내가 저런 처지에서 저런 곤란을 겪으면 안돼!
지금의 나를 솔직하게 보자. 씨발..... 딱 까놓고 뒤집어보니 냄새가 난다. 난 10년 조금 넘는 시간동안 조금 더 견고한 논리로 무장했을 뿐이다. 내가 효순이 미선이한테 미안했던건 감정적인 노여움만 가졌지 실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깟 노여움이라고 해봤자 그건 주한미군과 SOFA에 대한 불평등 조약에 관한 것이었지 자본의 논리에 비굴하게 무릎꿇은 제도의 불평등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저런 처지에서 저렇게 생활해서는 안돼!가 내 저항의 시작이었고,그래서 나는 80년대의 아픔을 무기력함으로 이고 지고 했던 것이다.
나는 박두만처럼 그렇게 얄팍한 감으로 세상을 더듬고 주위에서는 진짜 삶들이 잘도 죽어나갔다.
눈을 부라리고 둘러봐도 나를 뒤집어 쌓은 무력감은 주위에 그 많은 꽃들을 뭉턱뭉턱 잘라내고 있었던 것이다.
밥은 먹구 사냐?
나는 사회의 범죄자는 아니었지만 방조자로서 그렇게 살아왔다. 나와 그렇게도 술을 많이 마셨던 친구 태윤이는 한총련 덕분에 구속되어 지금은 잘 나가는 대우자동차 영업소장이 되었단다.
누구는 영화의 반을 보지 못했다.
나는 박두만이 던진 그 한마디 때문에 난데없는 살인범의 방조자가 되어서 집에 돌아가는 내내 입을 열지 못했다.
밥은 먹구 사냐?
오늘 나는 박두만이었다가, 조용구였다가, 서태윤이었다가, 끊임없이 방조자였다가 했다.
애초에 씨발 술래가 없는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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