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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딴생각

열하홉 소녀의 절규는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옷을 입지 않아도 됐다.
모기, 파리 같은 해충이 없었고 독사, 맹수, 독초가 없었다.
남자들은 고깔 하나를 자지에 씌워 다닐 뿐이었고, 여자가 입은 것이라곤 손바닥만한 UN이 지급해준 나이키 스포츠 팬티거나 바나나 잎으로 만든 속곳 같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바누아투 족이라고 했다.

그 섬을 찾아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누아투 족은 칡넝쿨을 발목에 묶어 성인식을 했다.
그냥 보아도 위태로운 얼기설기 엮은 덩굴나무 위에서 떨어져 가장 지면에 가깝게 머리가 떠 있는 자가 그 부족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취했다.

아, 박지선이 바누아투 족이었다면 추장의 와이프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차지였을 것이다.

호주에서 경비행기로 4시간을 달려 바다에 내렸다.
뗏목 같은 배에 내려 육지로 다다르자 파도가 높아졌고 먼저 가던 우리의 짐이 심해 속으로 빠져 버렸다.

라면, 김치, 쌀, 통조림이 든 부식 가방이었다.
일주일을 버텨야 하는 데 난감했다.

같이 간 이제 열아홉의 꽃다운 00모델 소녀는 입술을 떨었다. 카메라맨과 나는 서로를 넋 놓고 볼 뿐이었다.

도착하고 난 뒤,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먹을거리였다.

바나나는 그나마 먹을 수 있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는 목에 넘기기 힘들었다.
고구마 맛이 나지만 마처럼 콧물느낌의 끈적끈적한 그것은 참으로 넘기기 힘들었다. 얌이라고 불렀다.

소녀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참이슬처럼 맑고 모든 경험이 처음처럼 같았던 소녀는 오직 바나나와 몇 종의 열대 과일만으로 일주일을 버텨냈다. 먹은 게 없으니 쌀 것도 없었다. 하긴 그녀는 방귀도 안 뀔 것 같은 19세 00모델 소녀였으니까…….
민물이 귀한 그 지역에서 저녁마다 메이크업을 지우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3일째부터 피부 트러블이 생겼고 파운데이션은 두꺼워졌다.
화면에 잡히는 얼굴이 조금씩 커져가는 느낌이었다.

촬영 마지막 날, 청천벽력 같은 무전이 왔다. 이륙하는 지역의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막, 내 가방에 고이고이 꼬불쳐 두었던 덕용라면 5개들이와 깻잎깡통 팩소주 2개로 만찬을 벌이고 있던 차였다.

만찬을 망칠 수는 없었다. 바누아투의 바람은 투명했다.
소녀는 한 호흡에 면사리 하나를 다 먹었다.

만찬이 끝나고 다들 포만감에 누워 바투아투 하늘에서 남십자성을 찾고 있을 무렵,
난 말해야만 했다.

“비행기가 못 뜬다, 내일 모레 우린 나간다.”

“우주주죽~”

소녀의 인내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차피디님”
“응?”
“저, 화장실 좀 같이 가주면 안 돼요?”
“응. 안 돼”
“아, 저 일주일동안 한 번도…….”
“여기에 넌 화장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니?”

바누아투에 화장실이 있을 리 없었다.

집이란 것도 겨우 바나나 잎으로 비나 피하는 정도인 곳에서 화장실이 있을 리 없었다.

배변을 하는 곳은 5분정도 바다로 걸어 나가야 했다.
민물이 백사장을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가는 곳에는

좌우로 갈대가 무성했다. 사람들은 그 개울 사이에 다리를 걸쳐 놓고 거사를 치렀다. 19살의 영혼마저 맑은 소녀가 똥을 싼다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냥 참아, 난 널 성녀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현실은 시궁창, 일주일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한 위에 독한 라면이 들어갔으니 소녀의 영혼도, 배도, 직장도 모두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걸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달빛에 의지해 그녀와 함께 바다로 나갔다.
달은 영화에서 보던 것 보다 컸다. 남태평양에서 보는 달은 목포 은하수 다방 레지가 들고다니는 쟁반보다도 컸다.

나는 백사장에 벌렁 누웠고 그녀는 절대 어디가지 말라며 갈대로 들어갔다.

“차피디님!”
“응”
“귀 막으세요.”
“응”
“귀 막으셨어요?”
“응”
“그럼 제 말 어떻게 들어요.”
“응, 미안…….”
“귀 막으셨어요?”“…….”

은하수 다방보다도 큰 달.
하얀 포말이 짐승처럼 철썩이는 바다.
쏟아져 내리는 별.
자연이란 건 위대하구나. 파도소리만이 부셔지는 바다…….

“푸륵, 푸다다닥, 푸닥푸닥푸르다다다다닥~”

자연의 고요를 깨는 한 슬픈 짐승이 일주일간 참아야 했던 욕망의 소리가 들려왔다.

“푸득, 푸르르륵~ 뿌웅, 뿌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19살 소녀의 직장에서는 나올 수 없는 굉음이 고요한 남태평양 바다로 퍼져 나갔다.

쟁반보다 큰 달을 가로질러 익룡 한 마리가 “까악~ 까아악~” 하고 날아갔다.

내 마음 속에 살아 숨쉬던 열아홉의 아름다운 영혼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 날을 나는 ‘대자연에 도전한 한 슬픈 영혼의 절규’라고 제목을 짓고 잊지 않고 있다.




왜, 나는 그날 비상약 통에 있던 지사제를 그녀에게 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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