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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딴생각

고등학교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엄마는 울었다.
"너를 고계로 보내다니..... 내가....."
고계는 장충 고등학교의 옛 이름이었다.

그리고
1991년 학력고사가 끝나자, 담임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결국, 너희들 중에 서울대 가는 놈은 없구나."

송광태의 독도는 우리땅을 개사해서 우리는 노래했다.
"그 누가 아무리 실업계라고 우겨도 장충은 인문계, 인문계!!"
실업계 학교를 비하해서 만든 노래가 아니었다. 고3임에도 전혀 긴장감 없는 우리들의 자괴감이 만든 노래였다.

대한민국의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3:30, 4:30에 끝나는 학교는 없었다. 장충이 유일했다. 우리는 고3인 주제에 6학년 동생보다도 일찍 하교하는 게 창피했다. 근처의 당구장, 만화가게, 오락실은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윤리선생은 우리에게 부탁했다.
"지구의 평화는 이제 후배들에게 맡기면 안되겠니? 그렇게 마음이 안노여? 너희들이 아니더라도 지켜줄 후배는 너무나 많잖아. 내가 강남에서 출근하다 보면 다리를 건너면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 강남애들은 얼굴이 햇볕을 못봐서 허옇게 떠 있는데 다리만 넘어오면 애들이 구리빛이야. 건강해. 담배도 잘 피고. 이제 공부만 하면 돼. 지구의 평화는 후배에게 물려주고...."

1인1기. 누구나 하나쯤은 엔딩까지 갈 수 있는 게임이 하나씩 있었다.
잡기에 있어서는 탑클래스였다.

뽀리계에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전설적인 두 명이 있었다.
이천과 막판.
이천은 주로 정독 도서관에서, 막판은 남산도서관에서 자신들의 달란트를 뽐냈다. 학교 학습용품 외의 물품들 중 30% 정도는 이들의 손에서 분출되었다. 자기 형이 여의도 둔치에서 20대1로 싸울 때 가로수를 뽑아서 놈들을 처치했다는 백곰도 있었지만 그생퀴는 입만 열면 구라였다.

이천과 막판은 졸업식 전전날 금호동 사거리에서 하늘아래 일인자가 두 명 있을 수 없다는 우리의 조언에 따라 마지막 대결을 벌였다. 막판이 슈퍼마켓 앞에 진열되어 있는 종합선물세트를 숨기거나 도망치지 않고 태연하게 주인 앞에서 들고 나오자, 우리는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천은 고민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란 말을 남기고 금호 사거리 헌책방으로 걸어들어 갔다.

막판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할 즈음.

이천이 라벨을 붙이고 있는 주인 아저씨를 등지고 높이 100cm짜리 국어대사전을 양손에 끼어넣은 후 게걸음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천은 대학입학 통지서를 받았을 때보다 그때가 더 행복하다고 했다.

수위실의 황씨 아저씨와는 막역한 사이었다. 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정년을 맞이하시고 복수 가득한 몸으로 학교 수위일을 하셨다.
이북출신이었던 그는 입에 “이 간나 개새끼”를 달고 사셨지만 마음만은 천사였다.
“양현아, 너 섹스포르노 필름 볼래?”
심심하면 아저씨는 나를 그렇게 꼬셨다. 이명세 감독의 ‘M’으로 대종상 미술상을 탄 유주호와 나는 아저씨의 단골 고스톱 멤버였다.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며 연탄난로 위에 삼겹살을 구웠다. 2천원어치에 맛소금 180원짜리 한 봉지면 행복했다. 주호의 미장센은 그 수위실에서 별로 벗어난 게 없다.

가끔은 화학실에 있는 독일제 에틸알콜을 가져다 20:80 비율로 수돗물을 타 소주를 양조하기도 했다. 맛소금 한 스푼이면 분간이 되지 않았다.

수위실에는 등사실 열쇠가 있었다.
덕분에 주호네 담임은 주호가 서울대를 갈 유일한 놈이라고 끝까지 믿었다.
나와 주호만 믿지 않았다.

지금이야 동네가 재개발 되어서 야구를 좀 한다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별볼일 없는 장충의 야구부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대통령배 4강.
부산고와 붙었다.
다들 멋진 응원가가 있었다.
“끝까지 싸워라~ 어쩌구 저쩌구”
“용맹하는 기상의 어쩌구 저쩌구”
“불패신화 어쩌구 저쩌구” 했지만 우리의 장충은 달랐다.

“아, 부를까 말까, 부를까 말까, 에이 씨발, 니미, 조또, 불러도! 남자답게 씩씩하게 갈고리를 돌려라, 교가는 쪽팔리니 갈고리를 돌려라. 장충, 장충 갈고리 시작!” 선창을 하면 애들이 따라했다.
“갈고리촌충 민촌충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장충, 장충 대장충 야!”

이 응원가를 TV로 들은 엄마는 살다살다 기생충을 응원가로 삼는 학교는 처음 본다고 했다. 다행히도 내가 선창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당구는 필수과목이었다. 불문율처럼 모의고사 점수와 당구점수는 같아야 했다. 250을 쳤다. 모의고사가 좀 더 나오자 친구들은 의리없는 새끼라고 했다. 나도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300으로 올리지는 않았다.

담임은 내가 250에서 300사이를 고민하고 있을 때 날 불렀다.

“양현아, 너 술 하지?”
“... ...”
“와라.”

한남동의 포장마차는 꼼장어 굽는 연기가 자욱했다.
이순의 담임은 내게 찬 소주잔을 건냈다.
“마시는 거 안다.”
조용히 받아 고개를 돌렸다.

“내가 볼 땐 너랑 한용이 밖에 없어 보인다. 한용이야 워낙 착실한 놈이고 경찰대 간다고 했으니 걱정 없는데, 넌 걱정이다.” 한용이는 우리반 반장이었다.
소주가 네 순배쯤 돌아갔을 때 담임은 말했다.
“너까지 망가지면 내가 참 슬플거 같다.”
조금 전까지 어떻게 하면 빠져나와 친구놈들이랑 딴짓을 할까 고민하던 생각이 사라졌다. 19살의 삶이 무거워졌고 눈물이 나려고 했다. 충혈된 눈이 쪽팔렸다. 괜한 연기탓을 하며 화장실을 간다고 나왔다.

투가리에 콩나물국이 다 식었을 때 우리는 나왔다. 비틀거리는 담임을 모시고 택시를 잡아 드렸다. 선생의 어깨 위에 밤안개 같은게 잔뜩 지워져 있었다. 한남동에서 집까지 난,

걸었다.









2007년으로 기억한다.

일본출장을 다녀왔고
공항에 도착해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켰다.

문자가 스물네통 와있었다.
“양현아, 선생님 돌아가셨다. 발인은.... 장지는.... ”

찾아갈 선생님을 잃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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