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딴지일보 전 영화 팀장이었던 나모씨는 중학교 시절 친구와의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꼬추를 랩으로 감싼 채 한 번씩 빨아주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고백한 적이 있다. 내 여동생의 대학교 동창이었던 아이는 고등학교 시절 자기를 사모하던 후배가 꽃다발을 전해주기 위해 달려오다 차에 치어 숨졌다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지어내 얄팍한 대학교 1학년 여동생의 감수성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 구라의 충격으로 내 여동생은 별놈의 신파를 봐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2)
결혼은 결국 자잘한 사랑의 감정을 되새김질해서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테제와 비열한 자본주의 종속이라는 안티테제의 싸움 속에서 우정을 재발견해 나가는 작업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결혼은 인내심이 빚어낸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긴 우정이 애정 되는 거고 오빠가 아빠 되는 거고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빼면 님이 되는 거다.
(3)
20년 만에 니퍼를 잡고 반다이제 MG등급 건담을 만드는 걸 취미로 삼은 지 벌써 넉 달이 되어간다. 무슨 이유로 프라모델의 취미를 버렸던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못 찾았다. 4만 원짜리 프라모델 하나도 일주일에 3시간씩 한 달이면 정도면 만들 수 있으니 이거 꽤 돈도 절약되고, 술도 줄이며, 집중도 할 수 있는 취미인데다가 워낙 날아다니는 성격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니 일석오조쯤 되어 보인다. 20년 잊고 지내던 취미를 사랑하니 옛 생각이 아주 새록거린다.
(4)
50여년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상봉은 그 자체만으로 드라마다. 옆동네 살면서도 마주치지 못했던 혈육과 택시로 2만원거리에 있으면서도 가보지 못하는 고향은 어느새 “넓은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는” 잊지 못할 이발소 유화 속의 그 그림처럼 박제가 되었다. KBS 이산가족 상봉 생방송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혈육의 상봉을 가슴 뜨겁게 보여주기도 했지만 만난 지 두 달 만에 2천만 원을 빌려가서 도망쳤다는 둥, 사소한 싸움에 원수가 되었다는 둥, 차라리 안 볼걸 괜히 만났다는 둥 뒷맛 더러운 소직도 적잖이 들어야 했다. 추억하는 것만큼 현실이 못따라온 결과다.
(5)
브로크백마운틴은 그리움의 영화다. 몇 주 동안의 사랑과 20여 년간의 이별의 감정이 덕지덕지 발려있는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한 감정을 되새기게 한다. 저 사랑이 과연 가정을 파괴할 만큼 강렬한 것이 아니라는 게 그 하나고, 환경이 만들어 놓은 불충분조건에서 이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나가는 꼴이 그 하나고, 3~40여 년 전 이반에 대한 냉담한 시선이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이라는 게 그 하나다.
추억은 좆나게 얄팍하다. 끝을 보지 못한 사건에 대한 욕망은 집요하다. 멀쩡한 가정이 있고 자신에게 헌신해주는 마누라가 있으면서도 친구의 의리(혹은 사업상의 접대)에 묶여 매일 술처먹고 들어와야 하는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가 애니스를 욕할 자격 없다. 가정을 속이고 부적절한 관계를 강요하는 기성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솔직히 사회(혹은 친구)와 간통하는 짓에 다름 아니다. 현실에서 책임져야하는 중압감에서 도망쳐 각종의 핑계를 안주처럼 양산해내는 상식적이지 못한 변명의 재생산 속에서 나는 내가 책임져야하는 대상에게 다시 상처를 주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꼬추를 랩으로 감싸 빨아주던 추억은 시간이 지났으므로 아름다워졌을 것이다. 20년이 지났기에 다시 만드는 프라모델은 과거의 추억으로 몰입하는 매개로서 또 설레는 것이다. 아직 상봉하지 못한 실향민들은 아직도 바람이 있기에 더욱 애타고 애잔해지고 설레고 기다려지는 것이다. 삶은 혹은 결혼은 생활에 묻혀 비루하고 더럽혀지고 부담스럽고 귀찮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중요한 것은 현실이고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은 눈앞에 있다. 죽은 놈 고추 만져봐야 발기할 리 없고 발기되었을 때는 자잘한 감성만 남아 바삭거리는 눈물 흘릴 뿐이다.
이안 감독이 무서웠던 지점이 여기에 있었다.
쓸데없는 신파 버리고 애니스와 잭의 마스터베이션을 걷고 나니 내 지저분한 현실이 다가왔다.
내 집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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