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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아먹은 글

<박하사랑>3류의 힘

by 그럴껄 200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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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1073/mo1073av_901.htm


[성영상 진흥위] <박하사랑>, 3류의 힘

2001.7.22.일요일
딴지 영진공 공인 위촉위원회


사실 나는 <박하사랑>을 봐야만 했다. 어느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박하사랑>의 원뜻을 들었을 때 그것이 설사 진실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제보자로부터 날라온 제목의 깊이를 알고 한동안 고민해야만 했다.

40억, 50억짜리 펀딩이 쏟아지고 블록버스터니 대작이니 하는 규모의 사대주의에 빠진 영화들이 스케일에 함몰되고 있을 때 기껏해야 몇천만원(비교하자면 기껏이지만 케이블 방송 외주제작을 하는 나로서는 저 돈에도 군침 고이지 않을 수 엄따)의 비용으로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그러나 그 손가락질의 당사자들이 더욱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기지가 너무도 재기발랄했기 때문이다.

그럼...과연 <박하사랑>의 제목이 저 비대한 주류의 한국영화와 비교되는 태생적 한계로서 갖는 즐거움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박하사랑>의 제목분석

박하사랑의 제목은 먼저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박하사탕>의 단순한 변조가 아니다. <박하사랑>은 놀랍게도 영화의 내용을 봐야지만 비로소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의 뒷통수를 치는 귀두흠찟할 재기를 숨기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당 비디오의 진짜 의미는 과연 뭣이냐? 놀라지 마시라. 당 비됴 타이틀의 진짜 짱박힌 의미는 '박하같은 사랑'이 아닌 '육군 박하사'인 것이다. 씨바.... 육군 박하사.... 그 육군 박하사와 빠굴하는 내용이 바로 <박하사'랑'>인 것임이다. 아... 본 우원, 이 대목에서 두 무릎 꿇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시대와 내용, 그리고 해학이 송대간의 네 박자처럼 저 네 음절 안에서 절묘하게 융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박하사랑>이 갖는 가장 놀라운 점의 하나는, 박하같은 사랑의 박하사 이야기를 동음이의(同音異意)적 표현을 써서 정확하게 두가지 의미를 영화의 내용에 부합시킨 점이다. 그러므로 저 절묘한 의미의 중첩은 과거의 김삿갓이 말했다던 선생내불알 생도제미씹 先生內不謁 生徒諸未十의 재기로움의 의연한 현대적 계승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임이다.

두 번째 놀라운 점은 <박하사탕>의 반향을 교묘히 업고 마치 <박하사탕>의 아류인 듯 포장하나 기실은 <박하사랑>의 의미에서 정작 박하(사탕)은 교묘히 제외시킨 점 되겠다. 그러나 <박하사탕>이 말하는 80년 광주에서의 비애를 육군 박하사의 애정행각과 대립시키게 만드는 내용의 설정은(물론 <박하사랑>의 내용에 80년 광주를 운운하지는 않지만 <박하사랑>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하사탕>의 진중한 무거움을 해학으로 승화시키고자하는 의도는 분명히 엿보임이다) 아주 절정의 절묘함을 내뿜는다.



아.. 육군 하사 박하사.. 씨바..

다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건 우리가 흔히 말하는 3류=저질의 공식 되겠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규모의 사대주의나 안일한 엄숙함이 곧 정도(正道)의 문화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음이다. <다찌마와리>가 3류의 정신으로 70년대의 신파를 패러디 했다고 해서 저질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Kitsch, 패러디, 해학은 모두 기존 문화의 본류를 비틀어 봄으로써 구조와 양식에 함몰되는 일반의 정신을 깨우게하는 2류, 혹은 3류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태생적 한계의 즐거움

서구의 정서중에 해학과 비슷한 것을 꼽으라면 풍자를 들 수가 있겠다. 그러나 해학이란 것은 야유나 모욕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호의를 가지고 상대에게 파고 들어가는 특징이 있음이다. 인생의 모순과 비속을 파헤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묻혀있는 선의 가치라든가 순박한 행복, 그리고 애정 같은 것을 인식하려는 데에서 꾸밈 없는 해학은 발견되는 것이다.

따라서 풍자가 인간 부정의 암시에 있다면, 해학은 어디까지나 인간 긍정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이다. 풍자가 지식인들과 가진자들의 냉소라면 해학은 못가진 자, 힘없는 자의 여유로운 팔뚝질인 거다.

<박하사랑>은 주류의 곁길에서 주류에 부합하고자 몸부림을 치는 패러디가 아니라서 사랑스럽다. 주류를 교묘히 조롱하나 그 조롱의 층위는 오히려 30억짜리 쓰레기버스터들 위에 군림한다. 물론 메이저들은 절대 이럴 수 엄따. 메이저는 패러디를 위한 자양분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규모를 갖는 자본은 행동반경에 어쩔 수 없이 제약을 받아야만하고 그러기에 구조적으로 굳어질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해 <박하사랑>은 가벼운 몸짓쯤 되겠다. <박하사랑>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박하사랑>의 내용적 참신성보다 이중통박의 패러디 구조를 우리 에로 비디오사에 새로 쓴 업적이 크기 때문이다.

<박하사랑>의 해학은 그 내용에서만 해학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박하사탕>이 말하는 한 인간의 처절한 삶의 모습을 자뭇 저질 패러디 비디오처럼 포장시켜 놓은 함정부터(니들도 <박하사랑>을 단지 <박하사탕>의 동음적 패러디로만 생각덜 하지 않았냐?) 내용의 박하사를 <박하사탕>의 그것과 교묘히 오버랩 시킨 구성까지 결코 만만하게 한 번의 딸감으로만 보아넘길 수는 없음이다.

그러므로 3류로 포장되었으되 의도되었건 의도되지 않았건 그 작품이 갖는 시대적 비판정신이 당 비됴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집착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마당놀이의 그 수많은 해학도 결코 해학이나 풍자를 산술적으로 계산해 나온 작품이 아니라 우리 정서 특유의 감성과 재담으로 채워진 것이라는 점을 까져먹어서는 아니 되겠다.

따라서 조선시대 지배계층에 대한 민초들의 흥겨운 마당놀이 풍자가 조선시대 3류의 자유였다면 작금의 16mm 비디오는 20세기 현대에서 곁가지 문화를 자처한 3류의 자유를 모색할 수 있는 일종의 또다른 방법일 수 있다. 메이저의 자본공식에서 이렇게 개겨 볼 수도 있고 쉬워 보이지만 무거운 본질을 안고 오늘처럼 니덜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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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이 당 비됴를 봤으면 한다. 그의 무겁고 진중한 고민을 이렇게 패러디할 수 있는 한국 3류의 힘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중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서 형 준식이 외친 것처럼 지금 이 순간 나는 우리 메이저 영화사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냐? 넌 어째서 그 나이가 되도록 규모와 알량한 작가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냐? 너는 왜 나처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살지 않냐? 너는 무슨 자격으로 저 높은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비겁하게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덧붙여서 1
<박하사랑>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보면 그런대로 딸딸이는 즐겁게 칠 수 있는 그런 내용되겠다. 본 우원 너무 오바질을 해서 이 글을 보고 <박하사랑>을 초이스해놓고 "씨바.... 안 서잖아!!" 하는 항의 멜이 올까 일말의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음.... 그러면 안되는데.....

우쨌든 당 비됴의 본질은 빠굴무비니까, 관객 기립에 최대한 공헌한다는 태생적 사명감을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글은 빠굴무비를 빠굴무비로만 인식하는 타성적 인식구조에 대한 개김으로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럼 즐빠....

덧붙여서 2
얼마전 <신라의 달밤>을 봤다. 좀 쪽팔린다. 내용만 쪽팔린 게 아니다. <신라의 달밤>을 찍었던 경주의 집(건달의 본가)이 본 우원의 프렌드가 세들어 사는 집 되겠다. 누가 <주유소 습격사건> 찍은 감독 아니랄까봐 영화찍고 나서 집이 공습맞은 개집 마냥 개판이 되었다더라.

그래도 우리나라 제일의 메이저회사에서 저렇게 뒷처리를 안하고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냐고 친구가 한탄하는 걸 경청했다. 제발 자기 똥 싸고 닦을 때처럼 뒤처리는 이쁘게 하자. 그래야 담에 또 찍을 수 있잖아!! 씨바...


딴지 영진공
성영상 진흥우원 차양현
(titop@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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