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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딴생각

닝닝하고 상큼한 터미널

by 그럴껄 200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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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내가 허진호를 좋아했던 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보여준 헛헛함. 또 봄날은 간다에서 보여준 담담함 같은거다.


감상의 절대역치를 맛보는 느낌은 '아무리 똥고에 낀 털 때문이라지만 똥의 잔상이 수도 없는 휴지질을 해도 그 이물감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아주 작고 소소하지만 그 소소함에 비할 데 없는 이물감, 그런거다.

스필버그는 단연코 헛헛한 영화를 만들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 필모그라피를 봐도 구성을 봐도 그가 주로쓰는 차용의 플롯을 봐도 그는 정말 어떻해든 결단을 내어야하는 감독이었다.

AI의 사족,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인과, 쉰들러리스트의 뜬금없는 감상, 어찌나 절절한지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밀러대위의 해설, 이는 마치 조폭 영화든 개그 영화든 에로 영화든 마지막은 꼭 감동의 도가니탕을 끓여 주셔야 된다는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국 영화 감독과 동일한 증상처럼 보였다.

그가 정말 힘을 뺐다. 정확히 말하면 반 정도 뺐다.

엔드류 니콜의 각본이 8할은 힘을 빼게 했겠지만 후반에 빗자루를 들고 뛰어나가는 인도계 청소부 할아버지의 감동이 똥꼬털을 세우는 "억지춘향적 마인드"는 아직 유효하다.

그러나 그런 후반의 티라노사우르스 눈꼽만한 단점을 제외하고 만남과 만남, 사람과 사람에 대한 매듭되지 않는 혹은 매듭되어질 수 없는 솔직한 설정은 설탕 반스푼이 덜 들어간 커피의 그 쌉쌀한 느낌대로다.

허진호는 진짜 잘찍는 감독이고 스필버그는 진짜 돈 잘버는 감독이다

허진호한테 "너 씨발, 좃도 천만도 못드는 감독이잖아"라고 도마뱀 수준의 주둥이를 못날리는 것처럼 스필버그한테도 "넌 씨발, 끝까지 힘을 못빼데..."라고는 말할 수 없는 거다.

어쩌면 스필버그도 나이 먹어가면서 머리위로 넘어가는 네이팜탄의 후달림보다 당장 내 신발 속에 들어있는 코딱지만한 돌멩이가 더 아픈 것임을, 더 절절한 것임을 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스필버그의 필모그라피 처음부터를 같이한 나한테도 이건 충분히 흥미진진한 변화고 또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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