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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딴생각

고속도로의 고독자.

by 그럴껄 2009.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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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의 가을은 추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풍족했던 돈은 오링이 났다.

성범이의 큐백을 메고 여름을 보냈다. 전국의 동네 당구장을 돌며 당구를 쳤다. SBS 대학당구선구권 대회에 나가기 전 마지막 찬스라고 했다. 오후에는 당구로, 밤에는 바둑이로 동네를 쓸었다. 100만원을 따면 50만원을 뱉었고 200만원을 따면 150만원을 뱉었다.

“더 따면 네가 어떻게 막아줘도 등 따인다.”

먹고 마시고 자는 데 하루 20만원이 들었다. 성범이는 언제나 반으로 나눴다. 일당 15만원이면 제법 돈이 됐다. 여름방학이 지나자 각자 400만 원정도 쥘 수 있었다.

성범이는 휴학을 했다.
나는 알토란같은 400만원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그런 게 고민으로 잘 써질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돈의 8할은 유흥비로 2할은 숙박비로 나갔다.

1998년의 가을은 추웠다.
강남역에서 술을 마셨다. 후배가 소개시켜준 여자는 직립보행만 했을 뿐이지 영장류라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현실을 도망치지 위해 술을 마셨다. 그녀의 차가 아카디아란 것도, 아버지가 용인의 땅부자란 것도 잊고 싶었다. 헤어질 말미에 “내 친구, 멋진 친구, 영택이를 소개시켜 줄게.”라는 대사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영택이한테는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줬다.

새벽 2시의 강남역은 번잡했고, 머릿속은 술로 복잡했고, 모든 게 뒤엉켜 있을 즈음, 나를 살리는 전화한통이 왔다. 잽싸게 ‘걸면 걸리는 걸리버’PCS폰을 열었다. 성범이었다.

“야, 학교로 와라. 잡아 놨다.”
“옥훼이” 풀리지 않는 혀로 대답을 하고 택시를 찾았다. 강남역에서 택시 잡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마침 ‘경희대’로 가는 버스가 보였다. 양재방향이었다. 의심이 갔다. 계산을 싫어하는 내 머리는 명령했다.
“병신아, 걱정 마. 돌아서 가겠지.”

버스를 타고 살짝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에 내가 타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기사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이거 경희대 안가요?”
“가는 중입니다.”
“근데 왜 시골이에요?”
“아, 수원 가니까…….”
“세워주세요”
“뭐, 미친…….”
“세워주세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고함이 나오자 버스기사는 고속도로 같은 곳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내리자마자 후회가 되었다. 고속도로에서는 택시를 잡을 수 없다는 걸 버스가 지나가자마자 깨우쳤다.
머리보다 몸이 한박자 빠르면 고생하는 것은 몸이다.

술김에 미친척하고 고속도로를 건넜다. 양쪽에서 헤드라이트가 무섭게 희번뜩 거렸다.
중앙분리대를 넘어가자 노숙자가 되었다. 온 몸에 검은 분진이 묻었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건 성공했지만 가는 길이 막막했다.

일단 걷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에서 검은 분진을 뒤집어쓴 184cm의 술에 쩐 괴물을 받아줄 자비는 없었다.
칼바람에 몸은 얼어붙었고 죽지 않으려면 걷는 수밖에 없었다.

세 시간쯤 걸었을까?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항문 쪽에서 터졌다.

술 마신 상태에서 찬바람을 맞고 걸었더니 설사가 요동을 쳤다. 직장은 문을 열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괄약근은 “난, 더 이상 못해!”라고 파업을 불사할 태세였다.

고속도로 오른편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논, 쭈구려 앉으면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비탈을 굴러 내려왔다.

동트는 새벽에 찬 공기가 폐를 훑고 지나갔다. 몇 대의 벼이삭을 뽑으면 휴지는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논에 들어갔다. 혹시 모를 침입자에 대비해 고속도로 쪽으로 자리를 잡고 엉덩이를 깠다.
항문이 행복에 겨워 울었다.
직장이 포효했다.
잠시, 힘들었던 3시간의 도보가 말끔히 잊히고 있을 즈음…….

“구잉, 구웽웽웽~” 소리가 들렸다.
‘멧돼지일까?’
‘새벽에 먹이를 구하러 온 산짐승일까?’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두려움에 신에게 빌었다.
“제발 멧돼지만 아니게 해주세요. 이대로 엉덩이 까고 죽으면 뉴스에 뭐라고 나오겠어요?”

“20대 신원불명의 남자, 온몸에 분진을 뒤집어 쓴 채 엉덩이 까고 멧돼지에 물려 사망”
생각하기도 싫은 헤드라인 기사였다.








순간, 갑자기 모든 게 환해졌다. 영화에서만 보던 플래쉬 효과가 현실에서 나타났다.

내 앞이 뻥, 뚫렸다.
앞에서 콤바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벼를 베어갔다.

난, 엉덩이를 깐 채, 드넓은 고속도로와 쌩으로 마주하는 상황이 되었다.

간절히 바랐지만 바라던 “신은 죽었다.”

고속도로에게 난, 그렇게 한참을 맨몸으로 맞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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