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0여년을 담 쌓고 살았던 열혈 로봇 애니메이션은 이제 ‘30대가 즐길 장르가 아니다’ 생각했습니다. 10년 만에 걸작이 나왔다고 주위에서 말할 때에도 그저 ‘우리 애가 볼 수 있을까?’ 정도의 생각뿐이었으니까요.
애 보여줄 요량으로 두어 편 다운 받았습니다.
다운받은 날 정주행으로 16편까지 보며 한가로울 늦봄의 일요일을 날려먹어야 했습니다. 아이와 아내의 따가운 눈총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만 이런 두근거림이 얼마만이던가요? 아, 아마도 제타 건담 시리즈를 복사본 VHS의 지글거림을 참으며 보던 때 이후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얼마 뒤 제작 스케줄 문제로 애니맥스 편성 담당자 분들과 회의 도중 농담처럼 말이 나왔습니다.
“가이낙스에서 만든 그렌라간이 들어오면 아마 애니맥스 쪽 확률이 제일 높을 테니 들어오면 꼭 주세요. 제가 만들거에요.”
말이 현실로 다가오는데 7개월 걸리더군요.
작년 12월 애니맥스에서 수입 결정했다는 말을 들었고 5월부터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후배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10년 만에 떨림을 준 만화,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주옥같은 캐릭터를 살려야 했고,
많게는 40년 가까이 차이나는 나이차를 고려해야 했으며,
동시간대 겹치지 않는 캐스팅도 신경 써야 하고,
무엇보다도 시몬의 성장기인 만화의 기본 골격을 해치지 말아야 했습니다.
카미나 캐스팅, 그래서 고민... 많았습니다.
원작에서 사무라이 같은 카미나 아우라는 27편까지를 지배합니다. 주 1회 방영인데도 말이죠. 주 4회 방송을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카미나가 독점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준다면 8화 이후, 카미나의 아우라 밖에서 극을 이끌어나가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시몬이 빛을 발하며 중반 이후를 끌어갈 시간적 여유가 없지요. 한 달 만에 종영까지 이르는 스케줄에 카미나의 존재감이 얕아질 수 없으니까요.
성우 연기도 연극이나 영화와 똑같습니다.
연기 잘하는 사람은 두 종류뿐이잖아요.
상대의 연기력까지 자신이 압도하면서 관객(시청자)의 시선을 끌어내는 연기자.
상대와 장치들(소품 등)에게 시선을 나눠주면서 극을 풍성하게 하여 극 전체를 풍요롭게 하는 연기자.
추송웅, 윤석화 같은 배우들이 전자라면 전무송, 최종원 같은 배우들이 후자가 되겠지요. 전 전무송이나 추송웅 같은 성우를 원했습니다. 아마 주 1회 방송이었다면 욕먹을 필요 없이 전자를 택하였겠죠.
제가 겪어본 서문석 성우님은 오랫동안 조연을 거치면서 본능적으로 상대에게 호흡과 감정을 실어줄 여지를 누구보다도 잘 남겨주는 성우분이셨습니다. 풍부한 성량과 무게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가끔씩 뒤집는 역할도 뛰어난 분이시죠.
특히 카미나 이전에 캐스팅한 어린 시몬역의 정재헌 성우는 원작보다 유약하고 소심하며 가냘픈 목소리였기 때문에 카미나가 조금 더 동네 형처럼 따뜻하고 배려하는 목소리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사실, 캐스팅 하고 나서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미 캐스팅뱅크나 성갤, 그렌라간 팬카페 등에서 오르는 가상캐스팅과는 전혀 별개의 캐스팅이니 욕, 배부르게 먹을 건 예상했지요.
“우리의 카미나를!!”이라며 성토하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방송의 기본 목표는 원작을 본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캐스팅이 아니라 극 전체의 균형과 처음 시청하는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즐겁게 보는 것에 있습니다.
근 석 달간의 작업이 지난 8월 14일 마지막 더빙을 마치며 끝났습니다. 아직 종편작업이 마무리 된 것이 아니기에 완전히 끝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큰 얼개는 마무리 된 것으로 봐야죠.
이번 작품에 특별히 감사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바로 부제 타이틀 한글화 해주신 영진공이 자랑하는 미(혼)녀 도대체님 입니다. 정말 원작의 느낌을 120% 살려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다만 가이낙스측이 원화와 관련된 문제제기를 해와서 천원돌파 그렌라간 한글타이틀은 16편부터, 부제 타이틀은 23편부터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 완벽하게 결정 난 사항은 아닌지라 단언할 수 없지만 아마 22편 이후로는 도대체님이 만들어주신 부제타이틀을 못 볼 가능성이 높기에 여기에 올려놓습니다.
끝으로 목이 터져라 끝까지 최선을 대해준 시몬역의 정재헌 성우님,
10년 가까이 만나지만 언제나 변함없는 요코 역할에 윤미나 성우님,
최고보다는 최선의 연기로 제 무리한 부탁을 웃으며 이해해주신 서문석 성우님,
오랜만의 정극 역할을 정말 카리스마 넘치게 소화해주신 유해무 성우님,
내가 사랑하는 용욱이 누나. 히밤!
언제나 조용조용히 계시지만 모든 성우들의 귀감이 될만한 노력을 보여주시는 이종혁 성우님
부부 캐스팅인줄 알았다면 절대 같이 캐스팅 안했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즐거웠던 박신희, 류승곤 성우님,
친구먹은 방성준 성우님, 어느덧 부처가 되어버린 사성웅 성우님, 카마수트라 화신 송정희 성우님, 왜 아직 만두인지 모를 조현정 성우님, 새로운 비랄을 창조한 양석정 성우님, 처음 일했지만 100% 믿음을 주신 니아의 서지연 성우님.
마지막 극 중반과 종반에 최고의 역할을 보여주신 아봉준, 김선혜, 김기흥, 이장원 성우님.
끝으로 이번 프로그램에 손발이 되어준 조연출 김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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