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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딴생각

반성, 그리고 반성을 딛고

얼마전, 변절을 이유로 박노해를 이재오, 김문수의 반열에 올려 놓고 속이 상했다. 넘버3의 마동팔 검사님처럼 "죄가 무슨 죄냐, 사람이 나쁜거지"라고 애써 계급에서 벗어난 자들을 폄훼하고 싶었다. 맑스가 얘기했다고 버디형님이 노래처럼 불러온 "사람을 믿지 말고 계급을 믿어라"는 역시 진리였다고 다시한번 믿고 싶었다. 언젠가 영진공 게시판에 썼듯이 송능한은 넘버3에서 시인이었다. 죄가 무슨죄냐? 이거, 계급을 믿어라하고 외치는 맑스에 비해 훨씬 근사하잖은가?

"저는 깨어있는 건전한 마초잖아요" 비겁하지만 되도록 근사하게 자신을 포장하면서 습자지보다 얇은 관용으로 세상을 다 품에 안은척 살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재오, 김문수만큼 당대에 치열하게 부대끼지 않았고(거기에 실체니, 목적따위는 의미 없다) 김지하처럼 존나게 폼나는 오적을 써보지도 못했고, 박노해만큼 세상을 고민하지도 못했다.

생각해보니 고아원 라면박스 쌓아놓고 증명사진 박아넣은 졸부들보다 세상 바깥으로 사랑해 본 적도 없다.

더 아팠던 건, 마누라도 박노해만큼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념은 바꿀 수 있다. 근데 사랑은 못바꾸지.
내가 이만큼 절절하게 썰은 못풀어도 사랑할 자신은 있다.
노동의 새벽 읽다가 이 시에 왜 이렇게 눈에 아프게 박히는지 쪽팔리게 눈물이 날 뻔 했다.

<이불을 꿰매면서> - 박노해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닳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다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