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세상의 딴생각173 구라 오딧세이 한양대. 뽀얗고 작고 귀여운 여자가 앞자리에 앉았다. 영택이한테 말했다. "야, 쟤 이쁘다." 영택이는 말했다. "병시나, 니가 쟬 꼬시면 내가 술값 낸다." 이미 소주 두 병반을 마셨기 때문에 쪽팔림 같은 건 없었다. 아줌마한테 도꾸리 한 병을 시켰다. 도꾸리를 들고 마주보고 있는 테이블로 갔다. "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요." 앉았다. "액면 딱, 보니까 내가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데 말 놓을게요." "네?" "오케이, 승락했고." "네?" "이름은?" "네?" 그녀의 눈빛이 "넌 뭐하는 새끼냐?"라고 묻는듯하다. 이럴 때 타이밍을 놓치면 난 한갓 불량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짐승같은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구면이라서... 몇학년이었지?" "저, 졸업했..... 2009. 4. 27. 서해 박경조 경사(사후 경위진급)가 중국어선의 저항에 삽으로 머리를 맞고 바다에 빠져 죽었다. 서해상 가거도로부터 200해리 지역. 바다는 검은색이었다. 사람이 빠지면 다시 떠오르지 않는 수심이라고 했다. 죽으면 시체도 찾을 수 없다. 3000톤급 경비함에서 비추는 서치라이트에 바다는 유리알 같았다. 파도의 포말조차 일지 않는 10월의 가을바다였다. 밤이면 섹스폰을 부는 함장은 나에게 “뱃사람”을 권유했다. 이런 잔잔한 날은 거의 없다고 했다. 서치라이트에 비춰진 바다 밑에는 커다란 해파리가 보였다. 소복의 귀신같아 보였다. “수온이 올라가면 해파리가 많이 보입니다.” 누군가 그랬다. 3003함에서 박경사의 부인이 위령제를 위해 배위에 올랐다. 그녀는 가거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편을 .. 2009. 4. 27. 고속도로의 고독자. 1998년의 가을은 추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풍족했던 돈은 오링이 났다. 성범이의 큐백을 메고 여름을 보냈다. 전국의 동네 당구장을 돌며 당구를 쳤다. SBS 대학당구선구권 대회에 나가기 전 마지막 찬스라고 했다. 오후에는 당구로, 밤에는 바둑이로 동네를 쓸었다. 100만원을 따면 50만원을 뱉었고 200만원을 따면 150만원을 뱉었다. “더 따면 네가 어떻게 막아줘도 등 따인다.” 먹고 마시고 자는 데 하루 20만원이 들었다. 성범이는 언제나 반으로 나눴다. 일당 15만원이면 제법 돈이 됐다. 여름방학이 지나자 각자 400만 원정도 쥘 수 있었다. 성범이는 휴학을 했다. 나는 알토란같은 400만원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그런 게 고민으로 잘 써질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돈의 .. 2009. 4. 22. 다시오지 않을 자전거. 전설의 고향 소재지가 나왔다. 5시 30분. 거기서 잤다가는 토막살인이라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양현아, 산 하나 더 넘자.” “응” 1997년 6월. 뜬금없이 자전거가 사고 싶었다. 중국제 알톤 자전거는 12만원이었고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브레이크를 잡아도 미끄러졌다. 떡본 김에 제사를 지낸다고 여행이 가고 싶었다. “형, 자전거로 여행이나 가자.” “그래.” 재웅이 형은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생각이란 걸 하기에는 너무도 가냘픈 머리를 갖고 있었다. 6월 20일 자전거를 타고 잠실로 가서 재웅이형과 합류했다. 오후에는 교부문고에 들러 도별 지도를 샀고 찬거리를 샀다. 스팸, 김치, 삼겹살, 멸치볶음 및 각종 밑반찬을 때려 넣고 찌개를 끓였다. 먹을 만 했다. 아침부터 비가 왔.. 2009. 4. 21. 다들 없는 사무실. 그러니까 나는, 스물 넷의 복학생이었다. 바람은 불고, 비가 내렸다. 아무도 없는 공강의실에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배가 헐레벌떡 뛰어 올라왔다. 80%가 남자인 법대에서 볼 수 없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에버랜드의 가을도 즐거웠다. 나는 부추전을 잘했고, 그녀는 부추전을 잘 먹었다. 별 이유도 없이 누구들처럼 늘, 헤어짐은 있다. 그녀는 결혼한다며 전화를 했다. 군수 아들이라며 걱정없이 살거란다. 잘, 살아라. 나도 결혼을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더 할 것 없이 아내와는 행복하고 아이와는 즐겁다. 머릿속에 스물네살, 비오던 공강의실은 유독 지워지지 않는다. 노래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2009. 4. 20. 인생역정 친구 용범이의 첫사랑은 박호순이었다. 그녀는 이름처럼 큰 가슴을 달고 있었다. 친구한테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 생각한 우리는 애써 모른척 했지만 그녀의 가슴으로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컵. 이름을 뒤집으면 순호박, 호박만했다. 몽골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사이즈였다. 아마도 몇대 조상을 훑고 올라가면 거문도 사건이나 제너럴 샤먼호 사건과 연관있을 핏줄일거라 조심스럽게 짐작할 뿐이었다. 첫사랑은 늘 그렇듯 실패한다. 용범이가 두번째 만난 사랑은 이름마저도 부르조아틱한 '노란금'양이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이름을 지었는지는 몰라도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무남독녀라 동생이 없었다. 노란똥, 노란변, 노란색, 뭐 둘째가 있어도 나쁠 것 .. 2009. 4. 20. 고등학교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엄마는 울었다. "너를 고계로 보내다니..... 내가....." 고계는 장충 고등학교의 옛 이름이었다. 그리고 1991년 학력고사가 끝나자, 담임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결국, 너희들 중에 서울대 가는 놈은 없구나." 송광태의 독도는 우리땅을 개사해서 우리는 노래했다. "그 누가 아무리 실업계라고 우겨도 장충은 인문계, 인문계!!" 실업계 학교를 비하해서 만든 노래가 아니었다. 고3임에도 전혀 긴장감 없는 우리들의 자괴감이 만든 노래였다. 대한민국의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3:30, 4:30에 끝나는 학교는 없었다. 장충이 유일했다. 우리는 고3인 주제에 6학년 동생보다도 일찍 하교하는 게 창피했다. 근처의 당구장, 만화가게, 오락실은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윤리선생은 우리에게.. 2009. 4. 17. 쟈스퍼 밴쿠버에 내리는 비행기가 4시간 연착을 했기에 당연히 갈아탈 비행기에 웨이팅을 걸어 놓아야 했다. 다행히도 토론토까지 가는 비행기는 3시간 뒤에 탈 수 있었다. 문제는 토론토에서도 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삼각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세관에 신고를 하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것이 새벽 2시. 낮은 기압에서 세균은 제세상을 만났다. 숙소로 들어가 짐을 풀고 신발을 벗는 순간,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고약한 냄새가 났다. 맡지 않고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가죽이 썩어도 이런 냄새는 나지 않는다. 차마, 객실에 신발을 둘 자신이 없었기에 비상계단 창문을 열고 걸쳐 놓았다. 다음날 없어진 신발을 프론트에서 찾았는데 비닐 네 겹으로 꽁꽁 묶여 있었다. 미스 한국일보이자 잘 나가는 리포터였던 그녀는 내 옆에.. 2009. 4. 15. 열하홉 소녀의 절규는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옷을 입지 않아도 됐다. 모기, 파리 같은 해충이 없었고 독사, 맹수, 독초가 없었다. 남자들은 고깔 하나를 자지에 씌워 다닐 뿐이었고, 여자가 입은 것이라곤 손바닥만한 UN이 지급해준 나이키 스포츠 팬티거나 바나나 잎으로 만든 속곳 같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바누아투 족이라고 했다. 그 섬을 찾아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누아투 족은 칡넝쿨을 발목에 묶어 성인식을 했다. 그냥 보아도 위태로운 얼기설기 엮은 덩굴나무 위에서 떨어져 가장 지면에 가깝게 머리가 떠 있는 자가 그 부족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취했다. 아, 박지선이 바누아투 족이었다면 추장의 와이프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차지였을 것이다. 호주에서 경비행기로 4시간을 달려 바다에 내렸다. 뗏목 같은 배에 내려 육지로 다다르자 파도가.. 2009. 4. 14. 이전 1 ··· 3 4 5 6 7 8 9 ··· 20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