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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순전히 저의 낮은 수준의 사진작품 이해력과 수준으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세계관을 살짝 재구성해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혹시 그를 추앙하시거나 흠모 하시는 분은 괜히 기분나빠하지 마시고 뒤로 버튼이나 종료 버튼을 눌러 주시는 게 훨씬 마음 편하실 겁니다.)
지난 금요일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름도 길다.) 작가전을 다녀왔습니다.
온갖 이즘의 시대를 몸으로 부딪친 거장을 목도하는 기분으로 갔다면 순 개뻥입니다.
사실 누군지도 몰랐죠.
최근 이전한 프로덕션의 대빵과 작가, 팀장 세 양반이 그 이름도 어려운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팬이라면서 가자길래 꼽사리 꼈습니다. 물론 양재동 예술의 전당이면 홍대에서 집에 가는 것보다 30분은 단축될 거라는 얄팍한 계산이 앞선 승낙이었습니다.
찰나의 거장이라는 수식어와 당대의 거물들. 까뮈, 아인슈타인, 맑스 에른스트 등등의 사진 속에서 당대의 지식인들의 고뇌와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앙리의 예술적 성취를 읽어냈다면 역시 개뻥이고 사실 내 돈은 아니지만 돈이 아까워서 설명되어지는 모든 것을 토씨하나 빼먹지 않고 읽어내려 갔습니다.....도 역시 뻥이고 그네들이 사진을 온전히 감상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란 너무 지루했기에 활자라도 찾아 읽은 겁니다.
찰나에 그가 무엇을 그토록 대단하게 찍었는지 장황하게 나와 있었지만 제가 부러웠던 건 “참 세상에는 여러 가지로 먹고 사는 방법이 있구나”였습니다. -앙리의 팬들께는 죄송합니다. 제 낮은 안목을 꾸짖어주세요-
‘제게 하이앵글을 이용하여 풍치를 더하는 기하학적인 도형의 패턴을 강조한다거나 현실의 세계가 생생한 빛을 띠고, 명암과 형태가 있는 장소에 꼭 자리 잡는 순간을 쉽게 포착하고’ 따위의 현학적인 설명이 가당키나 합니까? 제게 감동이 오는 사진이란 한 컷의 사진 만으로 앞뒤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그런 사진이면 충분히 감동스럽거든요.
어쨌든 휘이~ 휘이~ 거장의 사진은 일단 훑었겠다. 대충 그의 약력이나 그의 해설에 대해 읽는 순간 좀 발칙한 추리가 하나 지나가더군요.
1908년도에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을 몸으로 부딪치며 세 번의 목숨을 건 탈출을 통해 독재 이데올로기에 큰 거부감을 갖고 레지스탕스로서 활동을 합니다. 특히 좌파적 영향 아래서 대표적인 좌파지식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이죠. 1960년(?)대 부터인가 갑자기 좌파 지식인인 그가 도교, 원불교, 불교의 세계에 심취한다고 합니다. 흠, 이건 거의 김지하급 ‘변신’이 아니겠습니까? (김문수급으로 말하려다가 그건 차마 인간의 할 짓은 안된다고 생각이 들었기에.....죄송합니다. 앙리형)
통박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20대의 나이에 이미 개인전시회를 열었으며 똑딱이 카메라의 대가를 이룬 그는 분명히 세계 최고의 격변기를 지나 살아왔으며 후달리게 발전하는 과학과 그에 따른 이즘의 홍수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40대를 넘어가면서 찰나의 거장인 우리 앙리형에게도 뭔가의 ~이즘 정도는 있어야 할 만큼의 세계관이 필요한 시점이었죠.
그러나 스냅 카메라를 통한 촬영의 속성상 자신만의 조명도, 자신만이 취할 수 있는 구도도, 전매특허 같은 라이카 카메라를 버리기도 그는 싫었겠죠. 파벌과 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선생질을 하거나 문하를 두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48~50년까지 동양을 돌아다니다 보니 자신의 스타일에 딱 맞는 세계관을 발견한 거 아니겠습니까? 찰나에 영원이 있고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며 먼지 한 톨에 우주가 있는 불교(혹은 도교)의 세계 말입니다.
찰나를 찍는 그의 통박에 불교의 이데올로기는 아주 좋은 철학적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제게 불교나 도교의 이론을 빌어 그의 작품을 신선의 영역으로 밀어 넣은 몇몇 교수의 해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군요. 그의 작품은 예전부터 그래왔고 우연찮게 불교의 이데올로기와 서로 교집합 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지 그의 작품이 철학적 사유 속에서 철저히 계산된 듯 찍었다는 설명은 제 추리에 의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니까요.
제 상상은 여기까지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커머셜한 사진작가입니다. 그만큼으로도 충분히 대접받을만하고 칭송할 만합니다만 거기에 구차한 사족을 달아가면서 작품에 의미를 꾸역꾸역 집어넣은 해설은 정말 답답했습니다. 더 답답한 건 사진을 보러온 게 아니라 방학숙제를 하러 온 아이들과 몇몇 분들의 받아쓰기였습니다. 사진을 감상할 시간도 없이 해설을 꾸역꾸역 받아쓰는 아이들은 얼마나 지루하고 괴로웠을까요? 설명은 사진만으로 충분합니다. 제발 과잉의 부풀리기는 학교 가서 파벌 만들 때나 해 주세요. 오죽하면 제가 이런 상상까지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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