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딴생각

나는 따뜻한 말을 쓴 적이 있던가?

그럴껄 2004. 3. 23.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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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법학을 전공하다 국문학과로 전과했을 때, 나의 어머니는 나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니가 국어를 모르냐?"
내가 등을 돌린 법대의 창가에선 아직도 "무하자재량행위행사청구권"에 대한 행정법 강의가 들려왔고 겸임교수로 들어오신 사촌형의 형소법 강의도 들려왔다. 살인, 배신, 공갈, 협박에 치인 사례들이 주는 무게감은 내 주제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대충 모의고사에서 맞춰준 점수대로 자를대고 주욱 점수대를 그어 놓은 후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를 고른 것은 나의 의지였지만 나에게 이런 무력감을 준 것은 근본적으로 제도의 문제였다.

가끔은 글을 팔아먹고 산다지만
나는 아직 국어를 모른다.

나는 영상을 만들어 밥벌어 먹는다지만
나는 아직 그림을 볼 줄 모른다.

함민복처럼 난 아직도 버릴 준비를 못했고
밥벌이에 목이 메어
정통 수구꼴통당의 홍보영상물 제작 제의도
매몰차게 뿌리치지 못하고 고민하는 중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저 긍정적인 밥이었으면 싶고
아주 사기꾼은 아닌 이외수의
얼음밥으었으면 싶고

또 온전히 나의 밥이었으면 싶다.

저녁을 먹고 누워
기형도의 검은 잎을 다시 들추다
나는 왜 치열하지 않는가,
나는 왜 밥벌이에 목이 메는가,
나는 왜 고민하지 않는가를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3월 20일,
광화문에서 나뭉님(딴지일보 영화팀기자)은
나를 찍어서 딴지 간판에 올려 놓았지만
그게 내가 아니었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아직도 잿밥에 눈멀어
밥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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